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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4-19 13:20
현대사 아카데미. 한홍구 교수의 유신과 인간
 글쓴이 : 박진우
조회 : 643  
(사)수원민주화운동계승 사업회가 주관하는 현대사 아카데미 여섯번 째 강의(4월 18일)는 시민운동가와 김일성 연구로 유명한 한홍구교수께서 해주셨다.(“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강의 시작에 앞서 한옥자대표님의 사회로 세월호 영령들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했다. 한옥자선생님은 세월호의 참상에 목이 잠겨 말씀도 제대로 못이으면서도 “칠흑같은 어둠에서 고통스러워 하며 떠나간 소중한 아이들을 위한 묵념과 현재도 배 밑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아이들의 신속한 구출을 기원함을 담아 이야기 한 후 한홍구교수님을 소개 하였다.
한홍구교수님의 강의에 앞서 성공회대 총장을 역임한 이재정선생님(전 성공회 총장, 통일부장관)이 방문 하셨담 전 직장 동료이자 현대사를 활동한 시민운동가로서 잠깐 인사 말씀을청하신후 강읠를 시작하였다.
최근 한홍구선생님은 고문기술자 차동영(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고문 기술자) 같은 사람들을 찾기 위한 (가칭)독재부역사전편찬을 위한 활동에 함께 참여를 제안하며 후원카드를 돌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홍구교수님은 다양한 사진들을 통해 유신체제의 사건과 조사한 사람들을 소개하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김기춘과 김황식, 황우여이다. 김기춘은 검사로서 유신을 만들었고, 대공수사의 달인이다.
황우여와 김황식은 법관으로서 유신체제에서 많은 젊은이들을 공안 판결을 한 사람들이다.
일명 무림사건은 안개 같이 실체가 없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유신은 아직도 무림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왜나면 유신이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소설이기 때문이다.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노무현을 민주주의 운동가로 만든 부림사건은 부산에서 나왔다고 하여 만든 이름이다. 이 또한 공안당국이 만든 소설이다. 한민통도 반국가단체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이 유신을 대변하고 있고, 당시의 주역들이 현재 박근혜 정부의 실세들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유신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김기춘 당시 검사, 황우여 당시 판사, 김황식 당시 판사.
이들은 사건을 만들고, 재판을 통해 이들이 국가를 전복하고자 했다고 판결을 하여 수많은 젊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보냈고, 지금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장은 당시 열혈 청년장교 였다.
이 나라는 유신 체제의 관계자들이 다시 부활하여 이 나라의 총리, 청와대 비서실장, 새누리당 대표, 국가정보원장 등 21세기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서 인명사전을 만들기 위해 차동영 찾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서해안에는 조그마한 섬들이 많은데 그중에 약 100정도가 모여사는 섬에 간첩 사건이 5건이나 발생했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사람이 이근안이다. 그는 조선일보가 주는 제13회 청룡봉사상을 忠부문에서 경위에서 경감으로 일계급 특진을 하였다.
간첩을 많아 조작해서 받은 것이다. 이 섬에는 북한과 가까워 납북이 자주 되었다. 그래서 고문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근안(가명 이석우)은 이렇게 간첩을 만들었다.
한겨례가 고문경찰 이근안을 찾은 것은 고 김근태의원이 고문을 받을 때 당시 기억을 되살려 수배했고, 기자들이 찾아 나섰다. 그리고 경기도경찰청 대공분실에서 찾았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 나서서 알려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청산되는 것이다.
어릴 때 ‘10월 유신, 100억불 수출, 1000달러 소득’이라는 표스터와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그렇게 꿈을 가지고 있었다. 유신의 구호였다(현재 탈북자들이 속출히는 현재 북한의 국민소득 규모이다)
당시 박정희는 그렇게 유신을 이끌어 갔다.
70년대는 역동적이란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정말 많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중에 내란음모 사건이 많았는데 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도 그 중에 하나였다. 그들은 술을 한잔 한후 박정희 물러가라라고 이야기 했고, 너는 중앙정보부장, 너는 국방부장관 등을 하라고 웃으며 이야기한 것이 내란음모죄다.
내란음모죄 제91조에 의하면 내란음모는 박정희가 한 것인지. 김근태, 장기표, 이석기 등이 하지 않았다.
진짜 내란 음모는 박정희다.
박정희는 여순사건시 반란죄도 무기징역, 516쿠테다. 유신 등 세 번의 내란음로를 하였다. 최규하는 내란 방조이고, 전두환, 노태우는 진짜 내란죄다.
서청원은 내란 미수죄다. 이명박도 내란죄다.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일본의 명치유신의 지사(일본은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을 이토오 히로부미를 대표로 이야기 함)들처럼 조국을 근대화 시키고 싶었다라고 하였다.
역사를 보면 우연인지 모르지만 몇가지 특징이 있다.
이토오 히로부미와 박정희의 공통점은 두 사람 다 총 맞아 죽은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제삿날도 같다. 1909년 10월 26일 사건, 1979년 10월 26일 사건이다.
더 의미있는 것은 시민운동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다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씨가 서울 시장에 당선 된 날이 10월 26일이다.
김대중납치시건을 조사하면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는 자료를 찾을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박정희는 박정희를 죽이라고 직접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임자는 요즘 뭐하나’라고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 이후 중앙정보부는 일본으로 가서 김대중을 대한민국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김대중을 납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지시를 받은 것이 없어서 결국 본인들이 탈출하고자 했던 배에 실어 김대중을 한국으로 데려 오는 것이다. 당시 이철희(이철희, 장영자 사건의 당사자, 공군 대령)가 김대중납치 사건에 실무 책임자였다.
이후 김대중납치사건으로 한일 관계자 시끄러워지자 박정희는 조종훈(대한항공)사장을 다나카 일본 수상에게 보내 돈(3억원 ?)을 다나카에서 바치며 무마 시킨다.
64년과 74년에도 두 번의 인혁당 사건이 발생하는 데 사건을 담당한 공안검사들이 일괄 사표를 사표를 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나중에 한 명은 빠짐) 문제는 간첩은 간첩인데 미국이 보낸 북파간첩이 다시 남쪽으로 오게 되는 내용이었다. 공안검사들이 오죽 했으면 사표를 낼려고 했을까이다. 공간검사들 당사자들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것으로 해석된다.
간첩으로 재건 사건이 발생 공안검사 4명이 사표를 냄.
식민지 청산을 하지 않아 발생한 것이 박정희와 장준하이다. 청산을 하지 않았을 경우 또 다시 박정희와 장준하 사건이 발생한다.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뇌에 나타난 사진을 보면 큰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이다.
박정희(17년생, 다카오 마사오, 만주 친일장교)와 장준하(18년생,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독립군. 진공작전)는 한국 현대사의 모습이다.
긴급조치 1호 장준하(보수주의자. 반공산주의자. 김구가 공산주의자와 협상했다고 김구와 헤어진 사람. 진짜 보수다. 보수는 민족을 들고 나와야 한다). 성조기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보수다 아니다. 진짜 진보는 625때 다 죽었다. 이 나라의 진보는 보수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진보는 유신이 만든 것이다.
유신은 박정희와 장준하의 싸움으로 표현 되었다. 박정희의 유신은 본인의 젊을 때의 만주의 모습을 재현한 것임.
박정희를 사령관으로 하는 병영국가는 구가 청년기를 보낸 시절 만주국의 국방체제나 일본의 총동원체제와 놀아울 정도로 유사했다. 황국신민으로 태어나 황국신민으로 연성된 ‘친ㅇ리파’ 박정희의 진면목은 청년장교 시절보다도 만주국이나 쇼와유신의 실패한 모델을 다시 살려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유센체제의 폭압성은 박정희의 지도력 부족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된다. 박정희는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따라 복잡해진 사회구성을 더 이상 최소한의 형식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방식으로는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60년대에서 70년대로의 ‘퇴행’은 박정희가 체질에 맞지 않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틀을 벗고 젊었을때처럼 익숙한 일본식 모델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해 들고 나온 것을 의미한다. 유신시대는 김근태와 그 벗들에게 내란음모라는 어어어마한 죄목을 뒤집어 씌운 자들이 일으킨 진짜 내란의 시대였다/
박정희의 부인은 육영수를 문세광이 쏘지 않았다. 재판 과정에서도 문세광은 웃음을 지을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문세광은 아마도 박정희를 저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박정희가 육영수의 오빠에게 한 이야기이다.
김대중을 납치했다가 문세광이라는 재일교포가 박정희를 죽이러 온 것이다. 당시 문세광의 담당 판사가 김기춘이다.
최태민과 박근혜의 출산설도 2002년에 크게 부각 되었다. 2007년에는 박근혜가 부인하였다. 박근혜는 당시 아기를 데리고 와 봐라라고 할 분위기였다.
당시 언론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 과정에 기독십자군 창설이 창설 되었다. 최태민의 직업은 경찰에서 목사, 이후 법사. 영생교 교주, 다시 목사로 전업하였고, 꿈에 육영수가 나타나 도와 주라 하였다라는 편지를 씀. 그래서 박근혜와 연결 된다. 이때 만들어진 기독십자군이 지난번 대선의 십자군 알바단이라고 생각한다.
6-70년대 이 사진처럼 길거리든 극장이든 애국가 나오면 애국심을 생길거라고 유신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국심이 우러나오게 한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도록 한 것이다. 나도 애국가가 나오면 몸이 기억을 한다.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북한과 삼성의 공통점이 있다. 3대 세습하는 것, 세계 최고라고 착각 하는 것. 그리고 집단체조를 하는 것이다.
유신 당시 짜장면 값이 30원, 당시 삼성동 좋은 땅이 3십원이었다. 당시 자본은 강남을 그렇게 사들였다. 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한 것이다.
짜장면값의 인상율과 삼상동의 땅값 인상율을 비교해 보라.
당시는 강남을 영동이라 불렀다. 영등포의 동쪽에 있는 마을.
정부는 영동의 땅깞을 올리기 위해 남산 1호 터널과 제3 한강교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국내 최고 명문고인 경기고와 서울고를 강남과 서초동으로 보낸다.
부자들과 명문고가 뭉쳐서 오늘의 강남과 새로운 족벌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박정희의 작품이다. 부동산 투기와 교육 정책을 만들어 낸 것이며, 우리는 그 곳에 서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와 민주화. 그것은 이 땅의 여성노동자들에 의해서 쓰여졌다. 그들은 이름도 남김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이런 사진 몇장 남겨 두고)역사의 이름으로 사라져 갔다.
당시 여성 노동운동가들에게 노동운동을 왜 열심히 하는지를 물었더니 노동조합에 가면 이름을 불러 주더라. 노동조합을 제외하고 하루 18시간 이상 일하는 공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은 3번 미싱, 5번 시다였다. 그때 까지 그들은 사물이었던 것이었다.
유신이 무너진 이유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배고파서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고 외치며 데모를 하였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8월 9일 신민당사로 몰려갔고, 그해 유신이 무너졌다.
1976년 7. 25일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지도부들이 알몸 시위를 하였다. 이 세대는 지금도 알몸 시위를 하고 있다.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
70년대는 4-5년동안 부산과 서울 등 데모가 존재하지 않았다. 부산도 재외동포 간첩 사건이 있었다. 김기춘이 자기 고향을 싹쓸이 하였다.
삽교천 준공식날 안가에서는 박정희가 발포를 하라고 했다. 차지철은 탱크로 밀어 버리라 했다. 중앙정보부장은 말도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차지철과 박정희를 죽인 것이다,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되어야 할 것이다.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유혈참사를 막은 것이다.
이후 518이 발생했다.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경호실장, 비서실장까지 4인방이 죽은 것이다. 이제 5번 참모총장만 제거하면 본인이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6번은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노태우는 박정희의 경호실 직원이었다. 그래서 유신이 끝나지 않고 이어진 것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를 이어ㅏ려던 유신잔당과의 싸움이었다. 518 광주는 나눔의 정신이었으며 민주주의가 있었다. 광주에서는 아무 사고도 없었다. 자율성에 의해 배고픔을 주먹밥으로 함께 나누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있었고 민주주의가 있었다.
전남도청을 장악했지만 악으로 지켰다. 도청을 전두환에게 넘기는 것이 싫어서 남았다. 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꽃 상여 타고 가지 않았다. 망월동으로 가는 길, 윤상원열사 등의 시신들은 쓰레기차에 실려 망월동에 실려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간직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떠나갔다.
이등 신문인 조선일보가 일등 신문이 된 이유는 ‘인간 전두환’을 08년 8월 23일자 특집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검색이 불가능하도록 했다. 쪽 팔린 줄은 아는 가 보다..
민청련의 두꺼비다. 옴 두꺼비는 뱀을 만나면 싸움을 건다, 두꺼비는 잡혀 먹지만 두꺼비는 뱀의 몸에 들어가 독을 품고 알을 낳고 뱀의 몸 속에서 죽는다. 하지만 두꺼비의 알은 깨어나 뱀을 먹고 다시 태어난다.
이해영 선생은 진짜 보수 집안이다. 집안에 정승이 5명이다. 8만석 부자다. 하지만 전 재산을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만든다, 자식들은 굶어서 죽었다. 이시영선생만 살아 남았다. 그들은 집안의 머슴들을 독립운동 학교에 보내고 안방 마나님들은 그들을 위해 손수 버선을 지어줬다. 진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이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장준하부터 백낙청까지 다 진짜 보수다. 625때 진보가 죽어서 보수가 양심을 가지고 오늘을 지키고 있다.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때 싹슬이 됐다. 진짜 진보들, 학자들은 다 죽고 죽전들만 남았다.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는 100 대 0에서 출발한 민주주의가 오늘에 왔다. 전쟁에 다 죽었어도 4·19를 학생들이 일으켰다. 대학생들은 4월 28일에야 나타났다.
우리 국민은 놀라운 복원력을 가지고 있다. 동학농민군이 2십만명이 다 죽었다. 그러나 또 일어났다.
10대 젊은이가 일으킨 민주주의를 박정희가 짓밟았다.
그리고 10년만에 유신, 다시 518. 6월 항쟁. 정권교체. 우리가 우리 힘을 믿고 가야 한다. 길게 보고 가야 한다.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바뀔 수 있다.
유신때는 5백명도 없었다. 지금은 민주노총, 전교조, 한겨레, 오마이뉴스, 환경운동연합 등 많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의다.
아무것도 안하면 반드시 진다. 글 쓰고, 댓글 달고, 떠들고 하라.
지리멸렬 하지 마라.
국정원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들이 짓밟아도 우리는 승리한다. 역사는 길게 가는 것이다.
민중은 살아 남아서 마지막 페이지를 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둥이로 쓰는 것이다. 여러분이 남아서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써 달라는 이야기로 140분간의 뜨거움을 마쳤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다시 감자탕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홍구 선생님은 그제서야 저녁을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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